김정은(金正恩[3], 1984년 1월 8일[1] ~ )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자 최고지도자이다. 2000년대 후반부터 김정일이 후계자로 내세우는 등 차츰 영향력이 커지고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2009년부터 국가안전보위부장,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등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2011년 김정일의 사망 이후 3대 세습으로 사실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조선노동당 제1비서 및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을 역임하고 있다. 보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는 조선로동당과 조선인민의 영도자라 부른다. 본관은 전주. 김정일과 고용희 사이의 둘째 아들이다. 스위스 유학 중 사용된 가명은 '박운'이다.[4] 김정일 사후, "당과 국가, 군대의 최고 영도자"로 칭해지고 있다. 2012년 4월 11일에 아버지 김정일을 이어서 조선로동당 제1비서가 되었으며, 4월 12일에는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되었다. 2012년 7월 18일 원수로 진급했다.[5]
2016년 5월 9일 자신의 조선로동당 제1비서 직책을 폐지하고 노동당 위원장에 취임하면서 새로운 권력을 얻게 되었다.
2016년 6월 29일 최고인민회의에서 국방위원회를 폐지하고 국무위원회를 신설했으며,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대신 국무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생애
생애 초기
김정은은 1984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방위원장 겸 수반 김정일과 무용수 출신 세번째 부인인 고용희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6] 친형 김정철이 있었고, 여동생으로 1987년에 태어난 김여정이 있다. 그밖에 이복 누나 김혜경, 이복 형 김정남, 이복 누이 김설송, 김춘송이 있다.
당초 그의 출생 정보에 관해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아 출생연도에 대해서 김일성 (1912년생)과 김정일 (1942년생)의 출생연도와 끝자리를 맞춰 1982년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며, 김정일의 요리사를 지낸 후지모토 겐지는 1983년생이라고 밝혔으나, 후에 대한민국 통일부와 국가정보원에서는 김정은의 유학 시절 여권 등을 근거로 1984년생이라고 결론을 내렸다.[1] 출생지에 대해선 평안북도 창성군이라고 알려졌으나,[7][8] 실제로는 강원도 원산시에 위치한 김정일의 별장 602호 초대소에서[9][10][11] 태어났다는 설이 있다.
학창 시절
김정은의 어린 시절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백인 여자를 상당히 좋아하고, 프랑스를 거쳐 16세 때 스위스로 유학하여 김나지움(Gymnasium, 인문계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한다. 스위스 베른의 공립 중학교에 유학[12][13], 유학 당시에는 '박운(박은)'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다. 학교 기록 등에 따르면 베른 공립 중학교 인근의 한 초등학교에서 독일어 보충학습을 받은 뒤 1998년 8월에 7학년(한국의 중학교 1학년 해당)으로 편입되었다. 그는 9학년이던 2000년말 학교를 그만뒀다. 당시 담임이었던 시모네 쿤은 마이니치(每日; 매일)신문에 “그가 점심시간에 교무실로 와서 ‘내일 귀국한다’고 말한 뒤, 다음날부터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13]
1990년대 대한민국에서는 그의 이름을 영어로 확인하고 김정운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2009년 북조선의 최고인민회의와 로동신문 보도를 통해 김정운이 아닌 김정은으로 확인하였다.
군 활동
귀국 뒤, 2000년대 중반부터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아버지 김정일 및, 조선노동당과 주변의 주목을 받기 시작[14]했으며, 2004년에는 아버지인 김정일의 권유로 조선 인민군에서 하전사로 입대하였으며 하전사로서 1년 6개월동안 군복무를 한 이후 하전사에서 곧바로 중장으로 진급[15]했다.
한편 김정일은 2009년 3~4월경 김정은을 국가안전보위부장에 임명해 자신을 대신해서 엘리트들을 감시하게 하고, 김정일 사후에도 김정은이 엘리트들을 확고하게 장악할 수 있도록 했다.[16] 그 과정에서 군사 조직인 국가안전보위부의 우동측 부부장이 김정은의 보위부를 통한 엘리트 장악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16]
정치 활동
2000년대 중후반부터 당에서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이로서 실질적인 무력정치활동이 시작되었다.
연평도 포격
연평도 포격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10년 11월 23일, 대한민국 연평도가 포격을 당했다. 이 포격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철저한 계획 아래 실시되었다는 분석이 대체적이다. 일본 《아사히 신문》은 12월 1일 북측 내 소식통을 인용해 “김정은의 이름으로 지난달 초 ‘적의 도발 행위에 언제라도 반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라’는 지령이 북한군 간부들에게 하달됐다”고 보도하였다.[17] 이것이 김정은 후계 구도를 더욱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되었는데, 특히, 김정은은 북측에서 포병 전문가로 미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업적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18]
한편, 대한민국의 시민단체 모임인 반인도범죄조사위원회는 이번 연평도 포격이 "계획적인 한국 영토 조준 공격, 민간인 거주 지역 공격, 대량 살상용 방사 포탄 사용 등의 공격 유형으로 보아 연평도 포격 도발은 유엔헌장 제2조 4항, 로마규약 제8조에 저촉되는 전쟁 범죄"라고 강조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정일과 그의 후계자 김정은을 '전쟁범죄' 등의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고발하였다.[19]
이와 관련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은 도발에 대한 책임을 남측에 떠넘기며, 정당한 군사적 대응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2010년 12월 28일 김정은은 연평도 포격당시 전사한 조선인민군 5명에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한 것으로 알려졌다.[20]
김정일의 후계자로
김정일이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명한 시점은 2009년으로, 대북 소식지가 이를 최초로 보도한 바 있다.[21]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사실 파악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확인을 거부했으며, 장성민 세계와 동북아 평화포럼 대표와 같은 국내 대북 전문가와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도 김정은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 등을 들며 후계자 지명설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바 있다.[22][23]
그러나 머지 않아 김정일이 자신의 후계자로 김정은을 지명한 것을 중국에 알리는 등[24] 후계자 지명이 구체화 됨에 따라 후계자 지명은 기정 사실화 되었으며, 김정일 유고시 김정은의 군부 장악 가능성에 대한 예측 보도가 뒤를 잇기 시작했다.[25] 그 후 2010년 9월 27일 조선인민군 대장 임명[26], 28일 3차 노동당대표회의에서 당중앙군사위 부위원장 및 당중앙위원 임명 절차를 거치며 김정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통수권 후계자로 공식 확정되었다.[27] 그동안 유년기, 청소년기의 사진으로만 알려져왔던 김정은의 얼굴은 후계자로 확정된 9월 28일 노동당대표회의 기념사진을 통해 언론에 공개된다.[28] 10월 6일엔 김정은이 후계자로 지명된 것을 경축하는 행사를 벌인다.[29]
김정은의 3대 세습체제 구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외에 불만을 가중시켰다. 북한 내부에선 3대 세습에 대한 반발 조짐이 일면서 김씨 부자를 비방하는 전단이 돌거나 폭약이 밀반입 되는 사건이 발생[30] 했으며, 일본의 친북단체인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내부 조직원들도 세습에 대해 반발을 보인다.[31]
최고지도자
권력 승계
2011년 12월 17일 그의 아버지인 김정일이 사망하자 김정은은 일단후계자로서의 업무를 맡게 되었고, 12월 30일에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32]2016년 5월 북한 노동당 7차 조선 당대회에서 노동당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당 위원장으로 추대하는 결정서 '경애하는 김정은 동지를 우리 당의 최고 수위에 높이 추대할 데 대하여' 가 7차 조선 노동당 당대회에서 채택되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016년 5월 10일 보도하였다.[33]
2012년
2012년 4월 11일, 김정은은 4차 노동당대표회의에서 노동당 1비서로 추대[34] 되었고, 이틀 후인 13일에 열린 북한 최고인민회의에선 국방위원회 1위원장에 추대되어 김정일의 직책을 모두 세습하는데 성공한다.[35] 이로써 근ㆍ현대사상 최초로 공화정 지도자의 3대 권력세습이 공식화됐고, 같은 날 광명성 3호을 발사하였으나 기술적 문제로 인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2012년 7월 18일 인민회의는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자 조선인민군 최고 사령관인 김정은에게 기존 대장 계급에서 2단계 높은 원수 칭호를 부여할 것을 결정하였다. 원수 칭호는 이미 사망한 김일성·김정일에게만 부여된 대원수의 바로 아래 계급으로, 이전까지는 리을설이 유일했었다. 원수 바로 아래 계급인 차수는 보직 해임된 리영호를 포함하여 현재 총 8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월 12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은하 3호를 발사하는데 성공했다. 로켓에 문제가 있어 정비를 위해 분해하는 것으로 위장하였다가 기습적으로 발사하여 은하 3호에 적재된 위성을 위성궤도에 올리는데 성공했다.
2013년
남북관계 위기
2013년 2월 12일에 함경북도 길주군에서 리히터 규모 4.9 (미국 지질조사국은 리히터 규모 5.1)의 핵실험을 강행하여 많은 나라의 규탄을 받았다. 3월에는 남북불가침합의를 폐기하겠다고 발표했으며,[36] 또한 각종 미사일이 핵탄두를 장착한 채 대기상태에 있다고 위협했으며, 1991년 남북 불가침 합의 폐기와 판문점 남북 직통전화 단절을 선언했다.[36] 이에 대한민국 국방부 김민석 대변인은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우리 한국을 공격한다면 인류의 의지,대한민국은 당연하고 인류의 의지로 김정은 정권은 지구상에서 소멸될 겁니다."라고 주장하였다.[36] 국방부 또한 조선인민군이 대규모 훈련을 위해 집결한 상태라며, 만약에 공격할 경우 대응 규모와는 상관 없이 응징하겠다고 강조했다.[36] 그 후 4월 26일 대한민국의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개성공단 내의 잔류인원에 대한 철수를 결정했으며,[37] 이에 따라 27일 개성공단에 체류하고 있던 126명이 철수했고, 29일에 나머지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38] 그러나 남은 잔류인원 50명 중 43명만 귀환 허가를 받았다(물론 나머지 7명도 훗날 귀환하였다).[39]
정적 숙청
장성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13년 12월 3일 대한민국의 국정원은 장성택이 실각했다고 밝혔다. 북조선 측은 12월 9일 오후 3시경 장성택이 전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체포되는 장면이 담긴 사진을 공개했다.[40] 12월 9일자 로동신문 역시 1면 기사로 장성택의 실각을 소개했다. 로동신문은 장성택이 숙청된 이유에 대해 "최근 당안에 배겨있던 우연분자, 이색분자들이 주체혁명위업계승의 중대한 력사적 시기에 당의 유일적 령도를 거세하려 들면서 분파책동으로 자기 세력을 확장하고 감히 당에 도전해 나서는 위험천만한 반당반혁명적 종파사건이 발생하였다"고 밝혔다 [41]
원고지 20매 분량의 1면 기사에서 로동신문은 장성택의 비위사실을 자세히 다뤘다. 로동신문에 따르면 장성택은 "앞에서는 당과 수령을 받드는 척하고 뒤에 돌아앉아서는 동상이몽, 양봉음위하는 종파적행위"를 일삼았다. 또한 로동신문은 "장성택은 당과 수령의 높은 정치적 신임에 의하여 당과 국가의 책임적인 위치에 등용되였지만 인간의 초보적인 도덕의리와 량심마저 줴버리고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을 천세만세 높이 받들어모시기 위한 사업을 외면하고 각방으로 방해하는 배신행위를 감행하였다"고 평가했다.
또한 로동신문에 따르면 장성택은 모든 직무에서 해임되고 모든 칭호를 박탈당한 것은 물론, 조선로동당에서도 출당 조치됐다. 로동신문은 이를 "장성택 일당이 적발 숙청됐다"고 표현함으로써 장성택 개인만 처벌대상이 아님을 시사했다.
북조선의 고위층이 조선로동당 회의 도중 끌려나가는 사진이 공개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조선중앙TV가 공개한 사진에는 장성택은 조선로동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맨 앞자리에 앉아있다가 북조선 보위부 요원 2명에 의해 끌려나가는 모습이 담겨 있다. 그리고 나흘 뒤인 12월 13일, 북조선 로동신문은 전날인 12일에 장성택을 처형했다고 밝혔다. 12일 로동신문 2면 우하단에는 재판을 받는 장성택의 모습이 담긴 사진도 실렸다.
이날 재판은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으로 진행됐다. 로동신문은 4일 전보다 더욱 상세히 장성택의 처형 이유를 공개했다. 신문에 따르면 장성택이 처형된 핵심적인 이유는 군대를 동원한 군사정변을 꾀했다는 점이다. 재판과정에서 장성택은 정변의 대상을 "최고령도자동지"라고 말했다. 즉, 김정은을 직접 제거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심리과정에서 장성택은 인맥 관계에 있는 조선인민군 간부들이나 보안기관 관련자들을 이용해 정변을 일으키려 했다고 말했다. 또한 장성택은 정변을 일으킨 후 총리직에 오른 뒤 자신이 주도하는 신정권을 외국으로부터 인정받으려 했다고 말했다. 이어 로동신문은 장성택에 대해 "천하에 둘도 없는 만고역적, 매국노", "당과 혁명의 원수, 인민의 원쑤이며 극악한 조국반역자"라 비판하며 "세월은 흐르고 세대가 열백번 바뀌여도 바뀔수도 없는 것이 백두의 혈통이다"라며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김씨 일가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재판결과 장성택은 북조선 헌법(공화국형법) 제60조의 적용을 받아 사형 판결을 받았다. 로동신문은 "판결은 즉시에 집행되였다"며 글을 마쳤다. 로동신문 기사에는 여러가지 장성택의 죄상이 나온다. 기사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42]
장성택은 김정은을 김정일의 후계자로 추대하는 시기에 계승문제를 비아냥대며("왼새끼를 꼬면서") 음양으로 방해했다. 구체적으로 조선로동당 제3차 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이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으로 결정되자 건성건성 박수를 치는 등 오만불손한 행동을 했다.
자신이 김정은("경애하는 원수님")과 자주 현지지도를 다닌 점을 악용하여 자신에 대한 환상을 조성하려 했다.
장성택에게 아첨하다가 해임된 자들을 교묘한 방법으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와 산하기관에 끌어들였다. 특히 청년사업부문에서 북조선을 배신한 자들과 어울리며 그들을 조선로동당과 북조선 정부의 중요 직책에 넣었다. 1980년대부터 리룡하를 심복으로 두고, 그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의 자리까지 오르게 했다.
대동강 타일공장에 김일성, 김정일 부자("위대한 대원수님들")의 모자이크 영상작품과 현지지도 사적비를 만들지 못하게 방해했다. 또한 김정일이 조선인민내무군 부대에 보낸 친필서한 비석을 그늘진 곳에 건립하게 했다.
장성택 자신에 대한 환상과 우상화를 조장시킨 결과 장성택이 있던 부서의 아첨꾼들이 장성택을 '1번동지'로 부르며 조선로동당의 지시를 거역하는 일이 있었다.
김정일이 최고인민회의 제10기 1차회의에서 세운 국가체계를 무시하고 내각소속 검열감독기관을 자신의 밑에 소속시켰다. 정부기관이나 지방단체를 멋대로 변경시켰으며, 외화벌이나 생활비 적용 등 국가경제에 관한 사항을 좌지우지했다.
자신이 정한 국가건설감독기구 방침과 김일성, 김정일이 정한 건설법이 어긋난다는 지적이 일자 "그럼 건설법을 고치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또한 평양시 건설사업에서 부패를 저질러 돈벌이를 했고 결과적으로 건설사업을 망쳤다.
경제적 혼란 초래: 석탄을 비롯한 지하자원을 마음대로 팔아먹고, 나선경제 무역지대를 50년 기한으로 외국에 매각했다. 또한 2009년 박남기를 부추겨 화폐개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화폐개혁)을 일으켜 북조선 경제에 혼란을 야기했다.
1980년대 광복거리 건설 때부터 국가 은행 자금을 빼내 귀금속을 수집했다.
2009년부터 여러 추잡하고 더러운 사진자료를 유포시키고, 가는 곳마다 방탕한 생활을 했다. 특히 2009년 한 해에만 비밀 금고에서 460여만 유로를 탕진하고 외국 도박장을 출입했다.
— 조선중앙통신이 밝힌 장성택 특별군사재판 전문 내용 발췌, 정리
안창연이 숙청당한 이유는 완벽히 알 순 없으나, 대한민국의 대북 전문가들은 장성택의 숙청 배경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12월 3일 국정원이 장성택의 실각 가능성을 발표한 이후 남한에서는 장성택과 그의 라이벌로 알려진 최룡해의 관계에 주목했다. 장성택의 숙청 사실을 국정원으로부터 보고받고 이를 대외적으로 알린 정청래 민주당 의원은 장성택을 제거한 것이 최룡해 군 총정치국장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최룡해는 최현 전 인민무력부장의 아들이다. 조선일보는 최룡해로 대표되는 훈신(勳臣) 세력과 장성택 등 김정은의 척신(戚臣)의 대결에서 훈신 세력이 승리했다는 분석을 내놨다.[43] 대북 전문가 김근식 경남대 교수도 "최룡해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이 밀어낸 것 아닌가 해석이 가능하다"며 북조선 내 보수세력의 입장이 관철된 결과라고 해석했다. 그 이유로 김근식 교수는 장성택이 중국, 남한 등과의 경제교류에 적극적이었던 데 비해, 군부의 중심인 최룡해는 원칙적이고 보수적인 입장이라는 점을 들었다.[44]
12월 9일 북조선에서 장성택의 실각 사실을 공개한 이후에는 김정은 일가가 직접 장성택 숙청에 나섰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한국일보의 주간지 주간한국은 장성택의 부인이자 김정은의 고모인 김경희가 장성택 숙청을 지휘했다고 분석했다. 또한 주간한국은 장성택과 그 측근의 비리사실은 김정은의 여동생인 김여정이 주도했다고 보도했다. 김경희가 자신의 남편을 제거한 이유에 대해 이 매체는 장성택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졌다는 점을 들고 있다. 장성택이 김정은을 제치고 사실상 북조선의 제1인자 행세를 하고 있는 데다가, 김경희 본인의 건강이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김씨 세습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장성택 제거를 선택했다는 것이다.[45]
헤럴드경제는 장성택이 김정은을 제거하고 북조선의 지도자 자리에 김정은의 이복형이자 김정일의 장남인 김정남을 세우려 했다고 보도했다. 장성택의 숙청 이유로 나온 "양봉음위"(陽奉陰違, 앞에서 받들고 뒤로는 딴마음을 품는다)가 바로 장성택의 김정남 옹위 시도를 뜻한다는 것이다. 또한 헤럴드경제는 중국에 체류중인 장성택의 핵심 측근이 최근 김정남과 접촉했으며, 이 사실이 장성택 일당이 제거된 핵심적 이유라고 분석했다.[46]
탈북자인 대북 전문가 이윤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소장은 12월 10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장성택 숙청은 김정은, 김정철, 김경희 등 김씨 일가가 직접 나선 것이라고 밝혔다. 이윤걸에 따르면 장성택 숙청을 최종 결정한 사람은 김정은과 김경희이며, 장성택의 측근인 리룡하 행정부 부장과 장성길 행정부 부부장을 체포하고 처형한 것은 김정철이다. 또한 이윤걸은 "‘김씨왕조체제’ 하의 김정은 3대세습체제에서 단지 태조대왕(김일성)의 공주 ‘김경희’의 남편(부마)이라는 이유로 성골은커녕 진골도 아닌 장성택이 2인자(세습후견자)가 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북한왕조독재체제’에서 1인 독재체제만 있을 뿐 ‘2인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이번 장성택 숙청으로 국내외에 과시한 것이다"라고 분석했다.[47][48]
평가
부정적 평가
연평도 포격에서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생활 등 여러 면에서 비판이 존재한다.
호화사치 생활
김일성때부터 이어져 온 호화사치 생활은 단연 비난의 대상이 되며, 그러면서도 인민들의 의식주를 생각하지 않는다 하여 "인민을 굶겨죽이는 지도자"라는 비판을 받는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의 2011년 1월 1일자 보도에 따르면 대한민국 정보기관 분석결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총 1억 파운드(약 1734억 원) 이상을 들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3남 김정은을 위한 호화주택을 잇달아 건설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건물에는 요트 선착장과 사설 기차역 등이 설치될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밖에도 함경북도에서 김정은을 위한 것으로 보이는 주택이 건설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49]
우상화 및 권력승계에 대한 비판
하태경 열린북한 대표는 10월 10일 일본 도쿄 메이지 대학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진행 중인 우상화 작업에 대해 비난하였다. 김정남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도 정권 세습을 하진 않는다'라며 세습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50] 이와 관련해서, 일본 산케이 신문은 김일성은 김정은을 손자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장남 김정남을 후계자로 보았고, 김정은 등은 정식 손자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보도하였다.[51]
논란과 의혹
이름 논란
김정일 3남의 이름은 김정일의 요리사로 일했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가 "키무종운"(일본어로는 キム・ジョンウン)이라 부르면서 김정운으로 알려졌다.[52] 하지만 이름이 김정운이 아니라 김정은이라는 설이 퍼졌고, 9월 중순 원산 인근에서 청년대장 김정은으로 표기된 선전벽보가 발견되었다.[53] 일본어는 김정은이나 김정운이나 똑같이 "키무종운"(キム・ジョンウン)으로 발음, 표기하기 때문에 처음에 일본인 요리사가 그렇게 말했던 것으로부터 혼선이 빚어졌던 것으로 보인다.[52] 이에 대해 원세훈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장은 "오래전부터 김정은이라는 첩보를 갖고 있었지만 북한이 확인해줄 사항도 아니고 이름이 중요한 사항도 아니라 발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54] 중화인민공화국 및 일본에서는 한동안 김정운의 한자표기인 '金正雲'으로 쓰는 경우가 많았으나, 그 후 한글 이름이 '김정은'이라는 것이 명확히 밝혀지면서 한자로 金正銀 또는 金正恩이라 쓰기도 했다. 10월 초, 조선중앙통신에서 김정은의 한자 표기는 金正恩이라고 밝히면서 일본 언론들과 중국 언론들은 金正恩으로 표기하는 것으로 확정하였다.[55][56] 한편, 서방 언론권에서 쓰는 Kim Jong-un이라는 표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여전히 사용하는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으로는 김정운과 김정은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성형수술 논란
중국 선전 위성TV는 2013년 1월 19일 김정은 제1위원장이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과 닮아 보이도록 성형수술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중국 언론인 관야오(管姚)는 이 방송에서 북한을 방문했던 중국 외교관을 언급하며 "우리 외교관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사적인 대화에서 북한 외교관에게 `김정은이 조부 김일성과 꼭 닮았다`고 하자 `성형수술을 했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신화통신은 서울 주재 특파원과 평양 주재 특파원을 모두 연결해 보도 경위와 근거를 추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평양 주재 특파원은 "북한에선 김정은 성형과 관련된 보도가 한 번도 없었다"며 "근거 없는 소문"이라고 말했다고 신화통신이 전했다.
어머니 논란
일반적으로 김정은의 어머니는 고용희(고영희)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이복형 김정남은 김정은의 어머니는 고용희가 아닌 김옥이라고 증언했다.[58]
건강
김정은은 에멘탈 치즈를 아주 좋아하여 에멘탈 치즈의 높은 칼로리로 인해 김정은은 엄청난 비만에 시달리고 있다. 또한 그로 인해 30살도 안 된 나이에 이미 당뇨병과 고지혈증을 앓는 등 건강이 심하게 훼손되었으나 항상 최고급 의료서비스를 받고 있으므로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일화
유순한 성격의 친형 김정철과 대조적이었다. 성격이 상당히 불같다.
2009년 여름 일본에 여행 중인 배석범이 그와 비슷한 외모 때문에, 김정은으로 몰려 일본 방송국에 오보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사진은 곧 대한민국의 각 포털 사이트에 김정은의 공식 인물사진으로 올려지기도 했다. 당시 배석범은 대한민국의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 무속카페를 운영하고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은하수관현악단의 애호가이다.[59]
2009년 6월 10일: 일본 TV 아사히는 김정은의 최근 모습이라는 사진을 공개했다. TV 아사히 측은 대한민국의 군당국에서 제공받은 사진이라고 밝혔으나, 대한민국 정부의 항의를 받고 한국의 신뢰할 수 있는 출처라고 정정하였다. 그러나 사진의 주인공은 김정은이 아니라 김정일과 외모가 비슷할 뿐 대한민국의 일반인으로 밝혀져 TV 아사히의 보도는 오보로 드러났다. 사진은 공개된 인터넷 카페에서 유출되어 대한민국의 군 부사관이 TV 아사히 측에 넘겼는데, 이것이 김정은의 사진으로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60] 사진의 주인공은 아사히TV, 사진을 제공한 군 관계자,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이다.[61]
2009년 6월 14일: 마이니치 신문에서 김정은의 16세 때 사진을 공개했다.[62] 이 사진은 그가 스위스의 공립학교에 가명으로 재학할 당시 급우들과 찍은 사진에서 나온 것이다.
2009년 9월 11일: 연합뉴스 속보에 의하면, 김정일 3남의 이름은 김정운이 아닌 김정은으로 판단이 된다고 발표했다.[63]
2010년 4월 20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김정은의 최근 모습이라는 사진을 공개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사진의 주인공은 김정은이 아니고 김책제철소의 김광남 기사장이라고 밝혔다.[64]
2010년 인민군 대장 공식화[65]
2010년 9월 29일 조선 인민군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66]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나 내각에 입각이 어려운 점을 감안하여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됐다.
2010년 9월 30일 로동신문 등에 조선로동당 대표자회 기념사진 속 김정은의 모습 공개[67] 공개된 기념사진.
2010년 10월 6일 김정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김정일의 후계자로 확정되었으며 이를 축하하기 위한 파티에 많은 주민들이 동원되었다.
2011년 1월 9일 김정은 전 국경지역에서 허가 없이 강을 건너는 자들은 사살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68]
2011년 1월 13일 김정은 체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공포 정치'를 시작한 정황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지난해 공개 처형된 주민이 전년(前年)의 3배인 60명이 넘고, '탈북자 무조건 사살' 명령으로 압록강·두만강을 건너다 숨지는 주민들도 늘어나고 있다. 조선인민군 내부에 '숙청 바람'도 불고 있다.[69]
2011년 12월 19일 김정일의 죽음으로 김정일의 철권통치가 끝나면서 김정은 체제가 시작되었다.[70]
2011년 12월 29일 김정일 추도대회에서 김정은이 령도자임을 선포했다.[71]
2012년 4월 11일 조선로동당 대표자회의에서 로동당 1비서로 추대되었다.[34]
2012년 4월 13일 최고인민회의에서 국방위원회 1위원장으로 추대되어 김정일의 직책을 모두 세습하였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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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은에 원수 칭호 수여
2012년 7월 18일 조선중앙통신이 중대 보도를 통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당 중앙군사위원회, 국방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정은에게 공화국 원수 칭호를 수여한다고 보도하였다.[72]
2013년 2월 19일 배우자 리설주와의 사이에서 득녀했으며 딸의 이름은 김주애이다.
2013년 12월 12일 고모부인 장성택을 숙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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